에세이 63

살면 살아진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 깊은 좌절을 경험한다.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살면 살아진다는 말이 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었다. 주로 같은 문중이 모여 사는 집성촌 마을이었다. 마을 안의 가구가 백 가구도 채 되지 않는 시골에서는 내 집 이야기 남의 집 이야기할 것 없이 집집마다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저절로 알아진다. 이모할머니는 윗집에 살고, 큰고모는 한집 건너 옆 짚에, 작은할아버지 집은 마을 중간쯤이셨고 나이가 가장 많은 큰할아버지는 마을 맨 아래쪽에 살았다. 마치 마을은 크 가족처럼 이어져 있었다. 종갓집 장손이었던 우리 집은 마을의 가장 위쪽이었다. 장손이다 보니 집안 행사가 많았고 특히 '시제'라고 불렀던 문중 제사가 많았다. 제사는 우리 집의 일상이었다. 일 년에 열 번이..

일상. 에세이 2024.12.30

마음이 담긴 국밥 한 그릇

밤새 끙끙 않았다. 독감 주사를 맞아 둘걸 ... 해마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았지만, 올해는 병원 갈 시간조차 여유롭지 않아 건너뛰었다. 콧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휴지를 아예 머리맡에 놓고 잤다. 깊은 잠을 못 자고,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 어제부터 몸이 안 좋았지만, 타이레놀에만 의지했다. 저녁에 들어온 남편은 버틸 걸 버텨야지 바보 같다며 폭풍 잔소리를 했다. "혼자는 병원 못 가냐. 아픈데 왜 참고 있어." 남편이 밉다. 아픈 사람에게 꼭 그렇게 혼내듯이 말해야 하나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휴일에 문 여는 병원을 검색해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갔다. 가는 길에 남편이 사준뜨거운 레몬 차 한잔에 기운이 났다. 병원에서 독감 검사를 하겠냐고 물었지만,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어서 안 한다고 했다. ..

일상. 에세이 2024.12.29

거절 못하는 것도 병이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 먼저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말고 누가 또 있겠는가. 그럼에도 주도적인 사람인가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라는 대답이 선뜻 안 나온다.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병이다. 고약한 불치병이다. 고쳐보려고 애쓴 적도 있지만 사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커피를 권하는 따뜻한 마음을 거절 못 하고 반 잔을 마셨다. 카페인이 있는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잘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밤을 꼴딱 새웠다. 마시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추운 날에 포장해 온 정성을 거절하지 못했다. 금요일이고 내일은 주말이니 잠 좀 못 자면 어떠랴 했지만 젊지 않은 나이에 밤새 쉬지 못하는 건 '안될 말'이라는 걸 미처 생각 못..

일상. 에세이 2024.12.28

다이어트의 정석

출근했더니 동료가 우유하나, 두유하나, 그리고 구운 계란을 주어서 고맙게 먹었다. 과자가 눈에 띄어 커피 한잔과 몇개 집어 먹었다. 점심으로 나온 갈비탕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늦은 오후 다른 동료가 곱창을 배달시켜서 배부르게 먹었다. 생각없이 주는대로 너무 먹었다.건강을 생각할 나이다. 몸 곳곳에서 나쁜 신호를 보낸다. 최근 건강검진에서 만성 위염과 고지혈증 진단을 받았다. 이십 대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건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건강은 누구도 자신할 수 없나 보다. 갓 서른, 임신 중에 극심한 입덧으로 열 달 동안 잘 먹지 못했었다. 임신 중반이면 입덧이 멈춘다던데 어찌 된 건지 마지막 달까지 음식을 맘껏 먹지 못했다, 아이를 낳은 후부터 그동안 못 먹은 음식의 한이라도 풀듯 먹었던 것 같다. ..

일상. 에세이 2024.12.27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나이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말처럼 시간이 순식간이다. 시간은 돈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나이다. 젊은 나이에는 그 소중함을 몰랐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은 공기처럼 무한으로 누리는 것인 줄만 알았다. 시간이 많다고 여겼기에, 남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며 살았다. 육아에 치여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어떻게' 삶을 바꿀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그 무한한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썼다면 내 인생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모두 '때'가 있고, '그릇의 크기'가 있다더니 흰머리가 듬성듬성해서야 사람다워지나 보다. 이제서야 독서와 글쓰기가 편하고 자유롭게 느껴지니 말이다. 두 딸이 초등학교 무렵에 책을 정말 좋아했었다. 방이나 거실에 하루 동안..

일상. 에세이 2024.12.26

작은 습관의 힘

매일 아침, 작은 습관이 우리 삶을 바꾼다.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의 이하영 작가는 인생을 바꾸는데 세 가지의 습관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는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의 이름을 내 목소리로 부를 때의 울림을 들어보는 것. 마지막으로 '아이는~'의 미소로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는... . 따라 하면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미소도 연습이 필요하다. "웃으면 복이 온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밝은 미소는 긍정의 힘을 가지고 있다. 감기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웃음도 주변에 전염된다. 긍정의 에너지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온다. 좋은 사람들로 가득한 내 삶의 운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인생이 바뀌려면 이 세 가지의 습관에 하나만 더 보태면 된다. 바로 세 가지 습..

일상. 에세이 2024.12.25

우리 작은 며느리 보고 싶었다

어머님께 따뜻한 외투라도 사드리고 싶었는데 가격표를 보고 망설이기만 하다가 돌아왔다. 체격이 작으신 어머님에게 맞는 옷을 고르기란 늘 쉽지 않다. 나이에 걸맞은 색상과 디자인이면서 최소 사이즈여야 하기 때문이다. 옷을 사드린 적이 많지는 않지만, 어머님은 내가 사드린 옷을 좋아하고 오래 입으신다. 값비싼 옷은 아니었지만 딱 맞는 사이즈였기에 그러셨으리라. 손위 동서인 형님도 어머님께 자주 옷을 사드린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보다 나은 형님은 브랜드 옷은 물론 값나가는 가방과 신발도 사드리곤 한다. 하지만 사이즈 찾기가 어려웠는지 형님이 사드린 옷은 늘 크다고 말씀하셨다. 반대로 나는 동네 시장을 돌며 나이 지긋한 분들이 입을만한 것으로 고른다. 시장 구석구석을 뒤져서라도 어머님의 취향에 맞는 색상과 ..

일상. 에세이 2024.12.23

한계를 깨부수다

100일 동안 백 개의 일상 글을 쓰는 중이다. 단순한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반복되는 출퇴근길, 비슷하게 흘러가는 업무를 빼고 나면 짧은 아침 시간과 저녁의 몇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시간이다. 책을 읽고, 필사하거나 글을 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읽고, 쓰는 시간이 좋다. 매일 반복하는 간결한 일상이지만 소중하다. 온라인 강의가 있는 날엔 시간에 쫓겨 한 페이지만 읽는 날도 있다.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가 존소포릭의 "부자의 언어"다. 생각이 복잡할 때 좋아하는 페이지를 펼쳐서 읽는다. "정원에 씨앗을 뿌리고 관리하자 정원은 고요하고 조화로워 보였다."라는 문장이 좋아서 노트에 옮겨 적고, 나 역시 정원에 씨앗을 뿌리는 중이라고 생각했다.매일 글 쓰는 연습을 하고 있..

일상. 에세이 2024.12.22

불행이 행운으로 바뀌는 감사의 가치

불행이라 여겼던 순간들이 감사한 순간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곤 한다."수리비는 18만 2천 원 정도 나오겠습니다.""네에? 아니 그렇게나 많이….""수리 맡기시겠어요?""... . 달리 방법이 없는 거죠?""네. 없습니다. 맡기시겠다면 부품 있나 봐 드릴게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 부품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건가? 생각도 하기 싫다." 네. 수리해 주세요. 아. 배터리도 이상 있나 봐주세요. 충전하면 하루가 채 못 가요." 평범한 금요일이지만 기분은 벌써 주말이었다. 코끝은 시리고, 해야 할 업무는 많았지만,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콧노래까지 부르며 출근을 서둘렀다. '설마 늦은 건 아니겠지!' 휴대전화 시간을 들여다본 순간. 붕! 날랐다가 곤두박질했다. 주차장의 턱선을 못 본 것이다. 맨땅에 엎드..

일상. 에세이 2024.12.21

그리움과 후회

아버지의 기일이다. 영정 사진 속의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늘 그랬듯이 우리 막내딸 왔냐며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신다. 엄마도 아버지 옆에서 수줍게 미소 짓고 있다. 여섯 남매가 한자리에 모인 걸 보니 두 분 다 좋은 신가 보다. 고기를 올리고 과일과 떡, 전과 탕국을 정성스레 올리는 오빠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덧없는 마음이 밀려온다. 생전에도 이렇게 푸짐하게 대접해 드리지 못했는데, 이 많은 음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 생활을 하셨을 때, 어린 두 아이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해 미안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 가곤 했다. 입맛을 잃은 아버지였지만 막내딸의 정성을 봐서인지 억지로 드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한번은 장어가 몸보신에는 그만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무작..

일상. 에세이 2024.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