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 깊은 좌절을 경험한다.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살면 살아진다는 말이 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었다. 주로 같은 문중이 모여 사는 집성촌 마을이었다. 마을 안의 가구가 백 가구도 채 되지 않는 시골에서는 내 집 이야기 남의 집 이야기할 것 없이 집집마다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저절로 알아진다.
이모할머니는 윗집에 살고, 큰고모는 한집 건너 옆 짚에, 작은할아버지 집은 마을 중간쯤이셨고 나이가 가장 많은 큰할아버지는 마을 맨 아래쪽에 살았다. 마치 마을은 크 가족처럼 이어져 있었다. 종갓집 장손이었던 우리 집은 마을의 가장 위쪽이었다. 장손이다 보니 집안 행사가 많았고 특히 '시제'라고 불렀던 문중 제사가 많았다.
제사는 우리 집의 일상이었다. 일 년에 열 번이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고모와 작은 할머니들이 제사 때마다 집에 오셔서 제사 음식을 같이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엄마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을 터다. 엄마의 음식 손맛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쩌면 사시사철 부엌에서 손에 물 마를 새도 없이 음식을 해야 했던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남은 음식을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는데 그 심부름은 주로 내가 도맡아 했다. 마을 어른들에게 집으로 오셔서 식사하라는 말 전달을 하거나, 바빠서 못 온다는 집에는 직접 가져다드리기도 했다. 큰 개가 있는 집은 특히 조심해야 했다. 큰 개를 무서워하던 나는 심부름을 자주 하다 보니 남의 집 마당을 살피던 버릇이 있었다.
한번은 심부름을 가던 중 평소 나를 예뻐해 주시는 할아버지 마당을 습관처럼 살폈다. 집에서 심하게 싸우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다툼 소리였다. 무섭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걱정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말을 해줄까도 싶었지만 심부름 마치고 '다시 와봐야지'했었다.
그 짧은 시간에 다시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엄마는 내게 얼른 집으로 가라며 앞을 가로막았다. 엄마는 쉬쉬하며 말을 안 해주었지만 심한 부부 싸움을 했던 할아버지가 비극적인 선택을 했단 걸 알았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니까.
언제나 화목했던 집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한동안 충격에 빠졌었다. 매일 인사를 하고, 늘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신 할아버지였는데 왜 나쁜 선택을 한 걸까. 어렸어도 그때 알게 됐던 것 같다. 우리가 알고,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고등학교에 다니던 언니의 친구 집이기도 해서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됐다. 어른이 된 이후로 그날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죽음이 삶보다 쉬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역경을 이겨낼 힘을 지니고 있다. 죽음이 삶보다 나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살면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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