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6

결혼식 단상

시대가 변하고 결혼문화도 달라졌다. 주례사 대신 서로의 약속을 낭독하고, 하객들과 함께 즐기는 파티다. "그대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면 응원할 것이고, 그대가 무엇을 하던 지지할 것이다." 신랑과 신부의 떨리는 어깨만이 이 순간의 엄숙함을 말해준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어린 부부의 풋풋함이다. 둘째 조카의 결혼식이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애간장을 태웠던 녀석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숨이 막히게 더웠던 한 여름에 태어났고, 집으로 온 사흘 만에 다시 병원에서 생사를 다퉜다. 폭염 속 탈수였다. 의사는 살 수 있는 확률이 딱 반이라고 겁을 주었다. 반의 확률을 이겨낸 그 아이가, 이제는 어엿한 한 가정을 이루는 신랑이 되었다.오늘 저렇게 예쁜 신부를 맞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장난꾸러기..

일상. 에세이 2024.12.15

겨울이 오면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어찌 12월 한겨울에 떠났을까. 아버지와의 첫 추억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그날은 여느 날처럼 동네 골목이 시끌벅적했다. 언니 오빠들 틈에 끼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해가 지자, 날은 더 추워졌다. 골목 저만치서 아버지가 걸어오셨다. 손에 든 큼지막한 과자 상자가 보였고 그것이 아버지보다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태어나 처음으로 구경한 오리온 초코파이였다. 당시에는 파란색 상자에 갈색 빵의 그림이 있었고 상자 크기도 꽤 컸다.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과자 상자에 쏠렸다. 일순간에 조용해진 골목 안이었다. 언니 오빠를 지나서 내게 걸어오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 품에 떡하니 안긴 과자 상자 덕분에 한동안 우쭐했다. 오빠도 언니도..

일상. 에세이 2024.12.10

포기할 수 없는 사랑

겨울이 시작된 이후로 가장 춥다. 추운 날일수록 식구 생각이 난다. '옷은 따뜻하게 입고 나갔는지.' 밖에서 끼니는 잘 챙겨 먹었는지.'아침에 아무리 바빠도 딸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 한마디 해줄 걸 그랬다.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하는 성인인데 아직도 품 안의 아이 같기만 하다. 작고 별것 아닌 것에 자꾸 참견이 하고 싶어진다. 퇴근 후 현관에 들어서며 "굿모닝!"이라고 딸에게 인사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가족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건 저녁이다. 아침 시간을 금쪽처럼 여기는 터라 일어나면 할 일이 많다. 일기 쓰고, 시간 가계부를 적고, 책 한두 줄이라도 읽는다. 밤새 어질러 놓은 부엌도 정리한다. 정신없이 출근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보니 저녁이 되어서야 식구의 얼굴을 본다. 낯빛은 어떤지, 오늘 ..

일상. 에세이 2024.11.30

엄마! 오랜만에 순댓국

해가 짧아진 요즘 여섯시면 이미 날이 어둡다. 퇴근을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벌써 불빛들이 선명하다. 밝은 해가 있는 낮이 좋다. 늦가을, 이맘때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저녁이되면 조용한 정적이 감도는 시골의 밤은 고독하고 쓸쓸하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시골의 적막함이 싫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만이 적막을 깰 뿐이었다. 불빛이 많은 도시의 밤과는 사뭇 다르다 늦가을 찬바람을 맞으며 산 너머로 해가 사라지는 것을 매일 보았었다. 들 일을 간 엄마와 아버지는 사방이 깜깜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을엔 수확철이라 이것저것 손가는 일이 많았던가 보다. 적막한 집에서 컴컴한 외로움을 혼자 견뎌야 했다. 지금도 짧은 해가 사라지고 난 후의 어스름한 저녁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다. 퇴근..

일상. 에세이 2024.11.14

사랑과 용서는 동의어

생각에 꼬리를 물게 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이 그랬습니다. "스승이 필요한 당신에게"라는 첫 줄에서부터 질문을 주고 생각을 줍니다. 김지수 작가와 이어령 선생님의 죽음 혹은 삶에 관해 묻는 인터뷰 형식의 책입니다. 은유가 가득해서 곱씹어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돌아보니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라는 선생님의 한마디가 책 전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죽음은 그 선물을 돌려주는 것이 아닐는지요. "사랑과 용서는 동의어라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사랑이라는 단어도 크고, 용서라는 말도 큽니다. 사랑과 용서 사이에서 고민한 경험이 있습니다. 원래 사랑은 아름다워서 쉽다고 생각했고, 용서는 그릇이 크고, 내면의 힘이 강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어렵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

일상. 에세이 2024.11.10

진정한 사랑

"형님! 어머님 식사는 잘하시지요?" "원래 소식하시는 분이라…. 내가 입맛에 맞게 해드리지도 못하기도 하고…." 전화기 너머의 형님 목소리가 기운이 없다. 형님 나이 60이 넘었지만,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다.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죄송한 마음 때문에 전화를 자주 하기도 염치없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만 30년 넘게 근무하던 형님은 몇 해 전에 퇴임했다. 정년퇴직하고 나면 남들은 여행도 다니고 인생 2막을 잘도 시작하던데 내 형님은 퇴직하고 1년 만에 몹쓸 병만 얻었다. 깐깐한 남편 눈치 보느라 여행 한 번 마음 편히 다니지도 못했고,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을 싫어하는 아주버님 때문에 바쁜 직장생활에도 불구하고 외식도 안 하고 살았다. 밥은 꼭 냄비로 지은 밥만 드시는 아주버님이라서 형님 집에 가면 찰기 ..

일상. 에세이 2024.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