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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 후회

아버지의 기일이다. 영정 사진 속의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늘 그랬듯이 우리 막내딸 왔냐며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신다. 엄마도 아버지 옆에서 수줍게 미소 짓고 있다. 여섯 남매가 한자리에 모인 걸 보니 두 분 다 좋은 신가 보다. 고기를 올리고 과일과 떡, 전과 탕국을 정성스레 올리는 오빠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덧없는 마음이 밀려온다. 생전에도 이렇게 푸짐하게 대접해 드리지 못했는데, 이 많은 음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 생활을 하셨을 때, 어린 두 아이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해 미안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 가곤 했다. 입맛을 잃은 아버지였지만 막내딸의 정성을 봐서인지 억지로 드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한번은 장어가 몸보신에는 그만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무작..

일상. 에세이 2024.12.17

내 안의 허들을 끊어내기

어느 유명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의 말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1년 동안 책 네 권을 출간했습니다." 매일 꾸준히 글을 쓰다 보니 네 권의 출간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누구나 가능하다는 말에 잠시 멍했다. 나도 할 수 있을까. 독서 모임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 지가 일 년여다. 각자의 속도가 다르니 인플루언서 작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일찍부터 나의 글쓰기 목표가 뚜렷했다면 좋았겠구나 싶었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게 쉽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그랬고, 일상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그랬다. 좋은 글을 쓰려면 탄탄한 독서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여전히 쉬운 건 없지만 쓰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쓴다. 첫 책을 완독했을 때 독서 모임 리더의 말이 생각난다."햇살이 님 읽고 난..

일상. 에세이 2024.12.16

결혼식 단상

시대가 변하고 결혼문화도 달라졌다. 주례사 대신 서로의 약속을 낭독하고, 하객들과 함께 즐기는 파티다. "그대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면 응원할 것이고, 그대가 무엇을 하던 지지할 것이다." 신랑과 신부의 떨리는 어깨만이 이 순간의 엄숙함을 말해준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어린 부부의 풋풋함이다. 둘째 조카의 결혼식이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애간장을 태웠던 녀석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숨이 막히게 더웠던 한 여름에 태어났고, 집으로 온 사흘 만에 다시 병원에서 생사를 다퉜다. 폭염 속 탈수였다. 의사는 살 수 있는 확률이 딱 반이라고 겁을 주었다. 반의 확률을 이겨낸 그 아이가, 이제는 어엿한 한 가정을 이루는 신랑이 되었다.오늘 저렇게 예쁜 신부를 맞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장난꾸러기..

일상. 에세이 2024.12.15

책상 밑 하이틴 소설

소설이란 장르가 주는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자기 계발서만 읽다가 오래전 구입해둔 거라 있는지도 몰랐던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펼쳤다. 요즘 구하기 힘들 정도로 유명해진 이 책을 읽으며, 소설가라는 직업이 새삼 멋지게 느껴진다. 새로운 세계와 인물을 창조해 내는 일은 어떤 기분일까. 학창 시절 하이틴 소설에 빠져 살던 때가 있었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적당한 페이지가 하루면 충분했다. TV 드라마는 심장이 쫄깃해지는 장면에서 딱 멈추고 다음 편을 기다리게 하지만, 몇 시간이면 시작과 끝을 알 수 있어 속이 시원했다. 해피엔딩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다만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게 단점이었다. 수업 시간마다 책상 밑에서 몰래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업이 끝나면 쉬는 ..

일상. 에세이 2024.12.12

겨울이 오면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어찌 12월 한겨울에 떠났을까. 아버지와의 첫 추억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그날은 여느 날처럼 동네 골목이 시끌벅적했다. 언니 오빠들 틈에 끼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해가 지자, 날은 더 추워졌다. 골목 저만치서 아버지가 걸어오셨다. 손에 든 큼지막한 과자 상자가 보였고 그것이 아버지보다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태어나 처음으로 구경한 오리온 초코파이였다. 당시에는 파란색 상자에 갈색 빵의 그림이 있었고 상자 크기도 꽤 컸다.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과자 상자에 쏠렸다. 일순간에 조용해진 골목 안이었다. 언니 오빠를 지나서 내게 걸어오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 품에 떡하니 안긴 과자 상자 덕분에 한동안 우쭐했다. 오빠도 언니도..

일상. 에세이 2024.12.10

산타에게 받고 싶은 선물

크리스마스트리를 홀린 듯 보고 있었다. 한 아이가 내게 어떤 선물을 받고 싶냐고 묻는다. 어른도 산타 선물을 받는다고 믿는 모양이다. "행복을 받고 싶단다."라고 대답하자 아이는"산타 할아버지는 그런 건 안 줘요."라고 말한다."정말? 난 꼭 받고 싶은데.""내가 대신 줄게요. 자요!" 하며 가슴에 손을 대며 주는 시늉을 한다. 행복을 받고 싶다는 내 말에 딸 유이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 엄마에 그 딸이었구나!' 인제야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해마다 진땀이 났다."산타 할아버지께 뭐 받고 싶니?" 하고 서너 살 유이에게 물으면 '별'이라고 대답했다. 귀여워서 웃고 넘겼지만, 진짜로 하늘에 있는 별을 원했다. 다음 해에는 마법 지팡이를 달라고 했다. 장난감이 아닌..

일상. 에세이 2024.12.10

금손이 아니어도 괜찮아

조용한 일요일 아침이다. 밤사이 탁해진 공기를 환기하려고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훅 끼쳐온다. 찬 공기가 몸의 구석구석을 깨운다. 특별히 좋지도 않고, 나쁠 것도 없는 아침 살짝 우울하다. 이런 날도 있기 마련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푸른 바다다. 창문을 닫고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다.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나 책을 폈다. 산란한 마음에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기분은 뭐지?' 헛헛함 같기도, 허기진 것 같기도 한 배고픔이 밀려온다.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만한 재료가 없다. 주말에 즉석떡볶이를 해준다며 딸이 사놓았던 콩나물과 어묵 한 봉지가 다다. 간식인 줄 알고 사 온 맥스* 핑크 소시지가 보인다. 얼린 대파도 있다. 보이는 대로 때려 넣고 잡탕찌개를 ..

일상. 에세이 2024.12.08

안되는 것도 되게

" 되는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잘 되고, 안되는 사람은 용을 써도 안 되는 것 같아." 요즘 지역 재개발 동의서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언니의 말이다. 다음 주말에는 언니의 아들이 결혼한다. 아들 결혼은 안중에도 없는 듯 30년 된 2층짜리 단독주택 집이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느냐에 마느냐에 온통 정신이 가 있다. 아들 결혼이 코앞인데 준비는 잘 돼가냐고 물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당사자들이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부모는 할 게 없단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3년 전에 언니는 아파트를 청약해서 분양받아 이사했다. 30년 동안 살던 집을 팔지 않고 세를 주고 있다. 그 주택 집에 재개발 바람이 불었다. 골목 하나 차이로 언니의 집이 재개발 지역에서 벗어날 판이었다. 관련 기관을 쫓아다니더니 결국은 자기집도 ..

일상. 에세이 2024.12.07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곧 3월이면 초등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무리 지어 대화한다. "종이집 만들기 어렵다.""어렵지는 않은데 색칠하기가 힘들어. 울며 겨자 먹기야.""00아 고생 끝에 낙이 온다잖아."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속담이 스스럼없다. 뜻을 아느냐고 물으니 싫어도 힘든 일을 참으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한다. 또 다른 아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관한 책에 몰입해 있다. 내용이 궁금하여 어깨너머로 살짝 들여다보았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재 가톨릭교회를 이끄시는 분으로 가난한 삶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느냐고 물었더니 수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의 저력이 대단하다. 대부분의 요즘 아이들이 그런 것인지 이 아이들만 특별한 것인지가 궁금..

일상. 에세이 2024.12.06

여유와 게으름의 차이

여유가 게으름을 부르는 날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계획하지만, 그 계획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 그런 날이다. 바쁜 일상 중에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 집중하려고 애쓰지만, 자정을 넘겨서야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다. 간혹 여유 있는 날도 있지만 평소보다 일찍 끝내지도 않는다. 시간이 주는 여유가 게으름을 부르는 것이다.어제는 드물게 온라인 강의도 없고, 일찍 퇴근한 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총알처럼 집으로 향했겠지만,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다.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와 어묵을 먹고, 붕어빵까지 사 들었다. 여유를 부린 덕분에 집에 온 시간은 평상시 퇴근 시간하고 같았다.모처럼 찾아온 여유는 게으름으로 이어졌다. 청소도 정리도 미뤄둔 채 마냥 늘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일상. 에세이 2024.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