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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가

바람이 강하게 부는 아침 출근길이었다. 건강을 위해 걷기로 마음먹고 매일 아침 하천을 따라 걷고 있다. 버스를 타면 몸은 편하겠지만 아침에 조금만 서두르면 운동도 하고 교통비도 절약된다. 공기가 차다. 가을이 깊어지나 보다. 하얗게 핀 억새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런 날씨에도 부지런한 사람들은 뛰거나, 자전거를 타며 충실한 하루를 시작한다. 건너편에서 징검다리를 건너오는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조심해. 조심해."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손주와 산책을 나왔나 보다. "할아버지! 혼자 갈 수 있어. 나는 형이야." "아이고 잘 가는구나! 우리 00이 건강해야지! 건강해야지!" 돌다리를 건너온 할아버지와 손자는 웃는 모습이 똑 닮았다. 틈..

일상. 에세이 2024.10.23

비가 오면 오는대로

일하다 말고 창문을 열었다. 가을비가 촉촉하다. 잠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여름에 쏟아지는 시원한 폭우도 좋지만, 나뭇잎을 적시듯 보드랍게 내리는 가을비도 정겹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비를 감상하는 것은 좋지만, 우산 없이 비 맞는 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딸 유이의 대학 입학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갔었다. 대학 입학이 기념할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고등학교 3년 동안 너무 고생한 딸이었기에 무사히 졸업한 것만으로도 유럽 여행이 아깝지 않았다. 맞지 않은 음식과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로 스트레스가 심했고, 면역력에 문제가 생겨 각종 질환으로 힘들었던 딸이다. 스포츠 동아리 활동 중 아킬레스건 손상까지 입어 제때 치료를 못 하는..

일상. 에세이 2024.10.22

가을.낙조

구름에 걸린 해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서해 끝자락 바다 위에 붉은빛의 길이 만들어진다. 마치 처음 낙조를 본 듯 숨을 멈추고 집중한다. 기어이 바다가 붉은 해를 삼킨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쉬며 여기저기 탄식의 소리가 들린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색채에 감탄과 아쉬움의 소리다. "괜찮아 내일도 볼 수 있어" 아이를 달래는 젊은 아빠의 소리에 아이보다 내가 더 아쉬움을 달랬다. 늦잠이 달콤했다. 간밤에 휴일을 믿고 늦게 잠든 탓에 쉬이 잠이 깨지 않았다. 남편은 벌써 준비를 마쳤는지 옷을 차려입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강아지까지 함께 하는 나들이라서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다. 정리 안 된 집안 꼬락서니가 신경이 쓰여 청소라도 하고 집을 나서고 싶지만 참는다. 청소한다고 설치면 남..

일상. 에세이 2024.10.20

좋아야 할 수 있는 일

무엇이 바쁜지 요즘에 독서가 뜸해졌다. 읽고 싶은 책들이 눈앞에 쌓여 있는데도 잠시 앉아서 펼쳐보는 즐거움을 놓치고 산다. 책이라고는 써본 적 없는 내가 겁 없이 공저에 도전했다. 처음부터 욕심을 내려놓고 시작했기에 초고와 1차 퇴고까지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다른 참여자들의 글을 읽으면 주눅이 들어 포기하게 될까 봐서 읽지도 않았다.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는 데 아니다. 활발하게 이루어져 가는 공저 진행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부담과 압박감이 시작됐다. 최소한 민폐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원고를 붙잡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얼핏 들으니 퇴고가 시작되면 머리가 빠지고 지옥에 빠진다더니 빈말 같지 않았다. 글도 좋아지기는커녕 본래의 내 감정마저 사라지고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고 있었다. 손댈수록 좋아지라고..

일상. 에세이 2024.10.20

슈퍼문을 본 날

"엄마 왼쪽 창문 바깥에 하늘 좀 봐" 딸 유이 말에 고개를 빼고 자동차 유리창 밖을 올려다보았다. 크고 둥근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퇴근 후 모처럼 가족과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운이 좋게도 슈퍼문을 본 것이다. 슈퍼문은 지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뜨는 보름달이라서 크고 밝다. 무려 1년 2개월 만에 뜨는 큰 보름달이라고 한다. 10월 17일 8시 26분에 가장 크고 밝은 슈퍼문을 볼 것이라 했는데 우연히도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시간과 겹쳤다. 남편도 아이들도 말없이 각자의 시선으로 달을 보았다. 달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온종일 들 일을 하고 날이 어두워져서야 돌아오곤 했다. 마중 간 엄마 뒤를 졸졸 따라오다 보면 달도 따라왔었다. 달은 머리 위에서 함께 걷더니, 집에 다 와서도 여전히 머..

일상. 에세이 2024.10.18

행복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낙엽 하나가 사선을 그리며 발아래 떨어진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니 작고 벌레 먹은 나뭇잎이지만 내 것 같아 특별해 보인다. 나만 느끼는 작은 행복이다. 부자가 되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다. 많이 가져야 삶이 윤택해지는 거라고 믿었고, 행복은 미소 지으며 내게 올 줄 알았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삶은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마치 어렸을 때 가난한 우리 집이 이해되지 않을 때처럼. 내 부모는 부지런한 부자들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다. 사시사철 게으른 적 없었고 허리가 휘게 일하는데 왜 우린 항상 그 자리 그대로 가난한 것일까. 실제로 엄마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엄마랑 아버지는 매일같이 새벽에 일하러 나가서 어두워져서야 집에 오는데 왜 우린 부자가 안 돼?" 정확한 대답은 기억나지..

일상. 에세이 2024.10.17

이제는 나를 돌보는 시간

오랜 시간 내 삶의 중심을 아이들에게 두었었다. 아이들과 남편의 뒤에 있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려왔을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에너지를 많이 쓰고 살았다는 생각에 좋기도 하면서 동시에 안쓰럽기도 하다. 열심히 살았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열심히는 살았지만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직장인이다 보니 출근 준비 때문이라도 매일 거울을 본다. 오늘 아침에도 예외 없이 거울 앞에 섰다. 예전의 젊고 활기찬 모습은 어디 가고 다 늙은 여자가 노안의 실눈으로 짙어진 기미를 노려보고 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불안해 보인다. 자신을 스스로 돌볼 만큼 삶이 여유롭지 않았다. 이제는 나를 돌볼 시간이다. 어느 날 아이들이 다 컸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일상. 에세이 2024.10.16

우아한 엄마 되기

부모 노릇이 아직도 서툴다. 우리 엄마는 여섯이나 되는 자식을 어떻게 키웠을까. 초등학교에 가기 전 엄마는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을 한 적 있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날에는 ‘진짜 엄마’가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작은 김치 항아리를 옮기다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박살이 났다. 깨지는 소리가 퍽! 하고 어찌나 무섭던지. 엄마의 불벼락이 떨어지겠구나!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김치가 흙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김치만 못 먹게 된 것이 아니고 항아리까지 깼으니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아이고! 김치 못 먹게 됐네! 아까워서 어쩌냐!"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 혼나겠구나 싶으면 예상 적중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게 다였다. 책이나 드라마에서의 엄마..

일상. 에세이 2024.10.15

가을 수채화

가을 색채가 아름답다. 그새 붉어진 나뭇잎이 놀이터 나온 꼬마의 머리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발밑으로 떨어진다. 까르르! 웃는 아이 모습이 가을 수채화처럼 맑다. "너는 세상이 평면이냐? 원근법도 모르냐? " 중학교 2학년 미술 선생님에게 들은 말이다. 미술 선생님이라서 수업 시간에 당연하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듣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말이 지금껏 잊히지 않고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꿈이라는 것과 연결되어서 그렇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누구에게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미술 시간이 좋았다. 적어도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4절지 스케치북에 4B연필로 내 맘대로 이것저것 그리며 놀았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였다. 가을 풍경화 그림이었으니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반 아이들 모두..

일상. 에세이 2024.10.14

가능성과 희망

마음은 부지런히 쓰고자 하나 실력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괴로울 때가 있다. 책은 스승이라더니 게으름에 관한 책을 읽던 중 딱 맞는 글이 나타난다. "내 안에는 '큰 나'가 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주문을 외듯 중얼거린다." '나'는 전혀 작지 않아! 더 큰 '나'가 내 안에 있어. 신기하게도 쓸 힘이 생긴다." 그렇게 하루의 약속을 지켜나간다. '나'라는 단어 안에는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어서 좋고, 희망이 보여서 좋다. 행동하지 않아도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일상의 생각과 감정을 쓰기로 하고 스무날 가까이 실천하고 있다. 매일 쓰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스스로 정한 약속이기에 지키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타협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문을 건다. ‘더 큰 나가 내 안에 ..

일상. 에세이 202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