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말고 창문을 열었다. 가을비가 촉촉하다. 잠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여름에 쏟아지는 시원한 폭우도 좋지만, 나뭇잎을 적시듯 보드랍게 내리는 가을비도 정겹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비를 감상하는 것은 좋지만, 우산 없이 비 맞는 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딸 유이의 대학 입학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갔었다. 대학 입학이 기념할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고등학교 3년 동안 너무 고생한 딸이었기에 무사히 졸업한 것만으로도 유럽 여행이 아깝지 않았다.
맞지 않은 음식과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로 스트레스가 심했고, 면역력에 문제가 생겨 각종 질환으로 힘들었던 딸이다. 스포츠 동아리 활동 중 아킬레스건 손상까지 입어 제때 치료를 못 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고생이다. 쉬게 해주고 싶었고, 보상해 주고 싶었다.
첫 번째 여행지가 런던이었다. 히드로 공항에 내리자마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런던 날씨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허리춤까지 오는 캐리어를 끌고 숙소를 찾아갈 일이 심란했다. 여러 날을 계획했기에 짐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 우산을 펴들고 캐리어를 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불편한 상황에 한숨이 나왔다.
막상 그곳 사람들은 우산 없이 태연하게 걷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산이 없어도 뛰거나,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 표정조차 평온해 보였다. 당황하면서 우산을 꺼낼까? 우비를 입을까? 부산을 떠는 사람은 나와 남편밖에 없었다. 딸 유이의 이야기를 들으니 비를 맞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란다. 우산 챙기는 것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젖은 옷 세탁하는 건 귀찮지 않고 우산 쓰는 건 귀찮은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여행지에서 빨래가 편하지도 않을 터니 챙겨간 노란 비닐 우비를 입고 우산을 폈다. 나머지 식구도 형광의 우비를 쓰고 숙소까지 1킬로미터 남짓 되는 길을 걸었다. 런던 사람들은 무채색의 옷을 즐겨 입나 보다. 비도 오는 날씨에 어찌나 우중충해 보이던지…. 흑백 도화지에 알록달록 점을 찍듯 내 가족만 도드라져 보여, 창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왜 우비 색깔을 촌스럽게 노랑, 파랑, 형광을 샀을까? 후회하며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 경험으로 비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맞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받아들이는 삶이 멋있게 보였다.
꼼꼼한 성격의 남편은 일기예보를 챙기는 편이다. 비 예보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산을 챙기라며 가족 모두에게 전달하곤 한다. 눈앞에서 비가 오지 않는 이상 나는 잘 챙기지 않는다. 그러다 비를 맡기라도 하면 핀잔을 듣는다. 나는 벌어진 상황만 믿고, 남편은 일어날 일까지 믿는다. 누가 피곤하게 살고, 제대로 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예전에는 비를 맞는 것이 창피했다. 다들 우산을 쓰고 가는데, 미리 챙기지 못한 내가 게으르게 느껴졌었다. 런던 여행에서의 경험으로 지금은 비와 우산에서 자유롭다. 짧은 거리는 일부러 우산을 접은 채 걷기도 한다.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에 긍정적이다. 가끔 양말도 제짝을 신지 않는다. 빨래하고 나면 희한하게도 짝이 사라진다. 당당하게 다른 짝을 신고 나간다. 마치 요즘 트렌드라는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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