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른 첫눈이 내렸다. 나뭇잎 위에 소복소복 올라앉은 눈이 밥공기 같기도 하고, 엄마가 가끔 만들어 주던 하얀 찐빵 같기도 하다.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그땐 국민학교라 불렀다. 눈이 오는 날이면 엄마는 특별한 간식을 만들어 주었다. 팥이 가득 든 찐빵이 그것이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에 엄마가 밀가루를 꺼내면 신이 났다. 반죽이 살짝 질어야 빵이 부드럽다고 엄마는 말했다. 늘어지는 반죽을 손안에 빠르게 가두며 삶은 팥을 넣고 잘도 오므렸다.
아버지는 미리 가마솥에 불을 지펴놓고 물을 끓이며 대기하다가 보자기를 깐 채반에 반죽을 올려놓고 한 김 나게 푹 찌면 완성이다. 모양은 울퉁불퉁했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찐빵을 호호 불어가며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간식은 눈이 펑펑 오는 날에 먹는 뜨거운 찐빵인 줄만 알았다.
5학년 때쯤이었을까. 그날도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단짝 친구 수미네 집에서 처음 맛본 '찹쌀 부꾸미'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에는 이름을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고명 없는 찹쌀 부꾸미인 것을 알았다. 찹쌀가루를 개어서 동그랗게 빚은 다음 들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지져낸 간식이다.
요즘에야 들기름은 생으로 먹거나 다 된 요리에 살짝 뿌려서 먹는 건강 상식을 아는 세상이지만 그 시절엔 어디 알았겠는가.
입 안에 넣자마자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 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제 그 맛은 추억 속에만 존재하지만, 눈 내리는 날이면 그날의 특별했던 맛이 떠오른다.
결혼하고 얼마 후 아이가 생겼다. 입덧이 어찌나 심했던지 목으로 넘길 수 있는 음식이 없었다. 후각, 미각 등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공기, 바람에서도 매연 비슷한 냄새가 났고, 물에서도 비릿한 냄새가 났다.
먹는 대로 토했다.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닐지 할 만큼 입덧이 심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그 시절에 먹었던 들기름에 지진 고명 없는 찹쌀 부꾸미였다. 하지만 그걸 파는 곳은 없었다.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기억을 떠올려 가장 비슷하게 만든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친구 엄마가 해주던 찹쌀 부꾸미 맛의 반의반도 느껴지지 않았다.
놓친 부분이 있는 걸까. 다시 만들어 보아도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찹쌀 부꾸미는 내 생애 딱 한 번 먹어본 처음이자 마지막 겨울 간식이 되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음식에는 단순한 맛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건 바로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었다. 친구 엄마의 찹쌀 부꾸미처럼, 우리 엄마의 찐빵처럼 말이다.
지금도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때 그 부꾸미 맛을 떠올린다. 똑같은 맛을 느낄 수는 없지만, 추억만으로도 마음은 따뜻해진다. 어쩌면 그때 느낀 행복이 ‘맛‘이라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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