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어찌 12월 한겨울에 떠났을까. 아버지와의 첫 추억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그날은 여느 날처럼 동네 골목이 시끌벅적했다. 언니 오빠들 틈에 끼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해가 지자, 날은 더 추워졌다. 골목 저만치서 아버지가 걸어오셨다. 손에 든 큼지막한 과자 상자가 보였고 그것이 아버지보다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태어나 처음으로 구경한 오리온 초코파이였다. 당시에는 파란색 상자에 갈색 빵의 그림이 있었고 상자 크기도 꽤 컸다.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과자 상자에 쏠렸다. 일순간에 조용해진 골목 안이었다. 언니 오빠를 지나서 내게 걸어오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 품에 떡하니 안긴 과자 상자 덕분에 한동안 우쭐했다. 오빠도 언니도 동생조차 내게 잘 보여야 하나씩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형제와 다툴 때도 유독 나를 감쌌다. 무엇을 해도 잘했다 했고, 무엇을 하려고 해도 웃어주었다. 엄마에게 혼난 기억은 있어도 아버지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아버지께 해야 할 어려운 말이 있으면 나를 앞세웠다. 내 말이라면 들어줄 거라는 게 식구들의 생각이었다.
내 결혼식이 있던 날 아버지가 많이 우시더라는 이야기를 고모로부터 들었다. 언니들이 결혼할 때도 눈물을 보인 적 없었는데 막내딸 결혼식에서는 눈물을 보이신 거다. 결혼 이삼일 후 아버지와의 통화를 잊을 수 없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처럼 대화는 오갔지만, 아버지도 나도 눈물을 참고 있다는 걸 수화기 너머로 알 수 있었다. 몇 해 전 우리 곁을 떠난 엄마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엄마가 있었더라면 내가 덜 고생했을 거라는 말에 '엄마를 보고 싶어 하시는구나!' 마음이 아팠다. 먼저 떠난 엄마의 빈자리를 아버지도 나도 채울 길 없는 상실감 때문에 두 사람이 힘들었던 날이다.
내게 따뜻함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이다. 도리나 남을 대하는 태도를 말로 가르치거나 알려준 적은 없지만 당신의 살아온 삶의 태도로 알 수 있었다. 실패하고 좌절할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면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의 힘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내 아버지도 때론 나약했고, 힘겨울 때면 술에 의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을 향한 사랑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면서 아버지의 그 따뜻한 사랑을 떠올리곤 한다. 12월,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온다. 손발이 얼얼하게 추웠던 날에 과자 상자를 들고 오시던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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