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3월이면 초등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무리 지어 대화한다.
"종이집 만들기 어렵다."
"어렵지는 않은데 색칠하기가 힘들어. 울며 겨자 먹기야."
"00아 고생 끝에 낙이 온다잖아."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속담이 스스럼없다. 뜻을 아느냐고 물으니 싫어도 힘든 일을 참으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한다. 또 다른 아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관한 책에 몰입해 있다. 내용이 궁금하여 어깨너머로 살짝 들여다보았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재 가톨릭교회를 이끄시는 분으로 가난한 삶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
책의 내용을 이해하느냐고 물었더니 수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의 저력이 대단하다. 대부분의 요즘 아이들이 그런 것인지 이 아이들만 특별한 것인지가 궁금하고 알고 싶었다. 반나절 넘게 지켜보며 말 한마디 행동하나 하나를 관찰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고 했다. 책을 읽는 아이들이 많았고, 크리스마스 리스를 꾸미는가 하면, 8급 자격증을 땄다는 아이는 한자 공부에 열심이다.
그때 한 아이가 그림책 한 권을 펼치더니 바둑판 모양의 공책에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띄어쓰기, 부호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꾹꾹 눌러쓰고 있다. 더 놀라운 건 한 아이로 시작된 그림책 내용 옮겨 적기가 반 전체로 번져 대부분의 아이가 책상에 앉아서 또는 바닥에 엎드려 저마다 그림책을 공책에 베끼는 것이었다. 마치 매일 하는 일상인 것처럼.
아하! 해답을 찾은 것 같아서 무릎을 쳤다. 아이들의 놀라운 어휘력과 나이답지 않은 독서 수준의 답은 필사였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습관이 아니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다. 교실에 있는 모든 그림책이 책장 밖으로 나와 아이들의 손끝에서 공책으로 옮겨지는 광경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감동이 밀려왔다.
책을 훑듯이 읽고, 독서 카드를 쓰는 아이들은 익히 봐왔다. 이 아이들은 그런 형식이나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진심으로 읽기를 사랑하고 본질에 충실한 아이들이다. 스승은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른인 내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나도 필사를 한다. 필사 이력은 길지 않지만, 필사로 인해 내가 변화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아직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필사의 힘을 실감했다. "00이 덕분에 우리 반은 언제나 웃음 한가득이에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어른인 나도 그렇게 조리 있고, 사랑스러운 말을 못 한다.
흐뭇하고 기분 좋은 하루다. 아이들의 미래가 무지개처럼 찬란해 보인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가 떠올라 미소 지었다. 책을 더 가까이해야겠다. 가끔은 귀찮게 여기던 필사를 더욱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를 통해서 나를 보고, 오늘도 귀한 배움을 얻은 하루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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