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집 밥과 외식 사이

빛나는 오늘 2024. 10. 9. 21:46

작년에 대학을 졸업한 둘째는 아직도 취업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먼 곳까지  실무교육을 받으러 다니느라 아침 일찍 나가고 어두워져서야 들어온다.  엄마의 퇴근시간인 6시 정시가   되면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배고파 집에 뭐 있어?" 딱히 준비된 음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똑같은 질문을 한다. 퇴근길을 서두르며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저녁거리가 뭐가 좋을까. 다들 밖에서 먹고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퇴근한다. 나는 집 밥에 진심인 엄마는 아니다. 결혼하고 아이들 키운 지가 몇십 해인데  아직도 살림이 서툴다. 반찬 솜씨가 제자리이고, 집안일이 손에 익숙지 않다. 아무리 직장 일과 병행한다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유독 심한 듯하다.

결혼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다. 남편에게는 친하게 지내는 일곱 명의 직장 동기 모임이 있었다. 모두 미혼이었고 남편은 먼저 결혼한 1호 유부남이었다. "이번 주말에 동기들이 집으로 오겠다는데 괜찮겠어?" 손님을 맞을 만큼 음식을 할 수 있겠냐는 얘기다. "걱정하지 마! 메뉴 짜서 장보고 준비하면 돼." 큰소리를 쳤다. 한 주 내내 메뉴를 고심하고 음식 준비를 했다. 마침  식품 영양학을 전공한 두 살 많은 친한 언니가 있어서 사정을 말하니 흔쾌히 메뉴에서부터 조리법까지 도와주겠다고 했다. 집이 멀어서 직접 올 수는 없었지만 든든한 마음에 걱정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양의 음식을 직접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릴 적 우리 집은 종가의 종손 집안이었고, 1년 중 제사 음식, 잔치 음식 만드는 엄마의 모습을 수도 없이 보고 자란 나다.  일곱 명의 손님 음식 정도야 얼마든지 하는 마음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음식은 망했고, 남편 동기들에게 두고두고 내 매운탕 이야기는 회자되고 있다. 지금도 가끔 남편이 동기와 통화할 때 "00씨 집에 놀러 오세요.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안부를 전하면 수화기 너머에서 "아이고 제수씨! 짜장면 시켜주면 가고 직접 만들어 줄 거면 사양합니다." 농담 같은 진담을 한다. 그렇게까지 음식이 별로였나 싶으면서 은근히 음식 트라우마가 생겼다. 요리에 재능이 없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흥미를 잃은 계기가 되었다.

둘째 딸 재이가 유치원 다닐 무렵 '엄마의 날' 참여 수업에 갔었다. 딸은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 엄마는 요리를 못하지만, 운전을 잘하고, 운동을 잘합니다." 좀 더 자라서는 엄마의 요리는 너무 창의적이고 난해하다 했다. 무슨 뜻으로 그리 말하냐고 물으니, 엄마는 음식에 본인이 넣고 싶은 것을 참을 줄 모르는 사람이란다. 된장찌개에 호박, 감자, 양파 말고도 다양한 채소를 너무 많이 넣고, 멸치 가루, 표고버섯 가루를 많이 넣어서 된장찌개 맛이 하나도 안 난다고 했다.

비염이 있는 큰아이 때문에 맛은 고려하지 않고 건강한 음식에만 치중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 비하면 많이 좋아진 편이다. 조미료에 관한 생각도 바뀌었다. 맛이 없어 안 먹는 것보단 맛있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은 것 아니겠냐는 남편의 의견에 동화되어 시중에 나와 있는 주부 백단들의 비법에 의지하고 있다.

집안 살림은 늘 나의 약점이다. 다 잘할 수는 없다. 대신 직장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업무로 인해 능력 없단 소리를 지금까지 들어본 적은 없다. 물론 실수할 때도 있지만 그거야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이해받는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닌가.

자주는 아니어도 외식을 한다. 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많지만 나는 밖에서 먹는 음식을 상당히 신뢰하는 사람이다.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매일 직장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고 있지만 주방 관리가 잘되어 내 집보다 몇 배는 깨끗하고, 좋은 재료만 쓴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 먹는 음식도 그럴 것이다. 경쟁력의 시대다. 건강이 최우선인 시대다. 사람의 입맛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왜 맛집에 줄을 서겠는가. 살아남으려면 깨끗하고 맛있게 할 수밖에 없다. 집 밥은 음식에 사랑이 있어서 좋고, 외식은 편리하고 맛있어서 좋다. 아무렴 어떤가. 나의 중심이 잘 서 있으면 된 거다. 집밥과 외식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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