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어머님의 시계

빛나는 오늘 2024. 10. 7. 22:47

"어머님! 아버님과는 어떻게 결혼하게 되신 거예요?"
"아. 집에서 정해준 남자라서 얼굴도 안 보고 시집을 왔지. 그땐 다 그랬어."
"처음 아버님 얼굴 보고 어떠셨어요?"
"얼굴 뜯어볼 정신도 없었다. 식구는 많은데 먹을 건 없고. 보따리를 몇 번이나 쌌는지 모른다." 

아버님과 살던 시골 집을 평생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어머니가 이젠 서울 사람이 되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일 잘하시는 어머님이 이젠 침대와 거실 외에는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어머님 피부가 맑아지셨어요. 시골에 산 적도 없는 분 같아요." 너스레를 떨었다. "어서 가야지" 하며 남은 삶에 미련이 없다신다. 어머님 좋아 하실 만한 이야기를 이리저리 궁리해본다. 살아 생전 세 끼 따뜻한 밥을 하게 만들었다는 시 아버님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시 아버님은 내가 결혼하던 해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애써 장단을 맞춰주신다. 어머니 다운 모습이다.

어머님은 열아홉 나이에 집안에서 정해준 사람하고 혼인했다. 어머님 인물은 보통이었으나 아버님은 배우 못지않게 훤하다. 언젠가 시댁 앨범에서 어머님의 흑백 결혼 사진(1950년 초) 본 적이 있다. 어머님은 '원삼 족두리' 를 하시고 몸집이 지금의 두 배 정도는 되는 체구셨고 아버님은 훤칠한 미남이셨다. 어머님은 귀한 티가 흘렀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시 아버님은 머리도 뛰어나서 공직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그 옛날 대의원에 출마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시 아버님 이야기에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신다. 당신을 고생 시키셨다 하면서도 그리움과 애정이 묻어 난다. 
 
어머님 친정은 부자 중의 부자였다. 열 아홉 이 될 때까지 세수 물을 마루까지 떠다 주는 이가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사극에서 보던 아씨 같은 존재였나 보다. 남편 말에 의하면 들판에 나가면 사방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땅이 외갓집(어머니 친정) 땅이었다고 했다. 부풀려 말할 사람이 아니기에 그저 놀라웠다. 그런 부잣집 딸이 어쩌다 가난한 남자를 만나서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험난한 삶을 사셨을까. 사람 인생은 알 수가 없다. 

어머님이 시집을 왔을 당시 당신 먹을 밥이 없어 굶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어머님의 시어머니께서는 밥 지을 쌀을 며느리인 어머니께 주고 들 일을 가셨는데, 그 양이 열 두 식구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 했다. 어머님의 시댁은  두 아들 내외 가족과 결혼도 안 한 시 동생 셋까지 열 두 식구였다. 여자는 며느리 둘과 어머님의 시어머니 딱 셋 뿐이고, 나머지는 남자였으니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큰 살림을 혼자 했던 것이다. 가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버님이 워낙 잘생기셔서 보따리 안 싸신 거 아니에요?" 싱거운 소리였지만 어머님 표정이 이내 밝아진다.

이제는 아버님과 평생 사셨던 그 시골 집을 영영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불안과 두려움이 어머님 표정에서 읽힌다. 남편은 어머님을 거짓말로 안심 시킨다. 건강해지고 다친 팔도 다 나으면 시골에 모시고 간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린 다 안다. 이제는 힘든 희망일 뿐이라는 것을. 심지어 어머님 자신도 알고 계신 듯 “다리에 힘만 돌아오면 가야지.” 하지만 목소리는 '그것이 가능하겠느냐'는 듯 힘이 없다. 

어머니에게는 귀하게 여기는 시계가 있다. 당신은 보물 1호라고 하신다. 흠집이 너무 많고 낡아서 속이 제대로 들여다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아버님이 군청에 다닐 때 사주신 시계라고 했다. 그런데 시계가 보물 1호 된 이유가 눈물겹다. 바로 밥을 할 시간을 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들 일을 하다가 12시만 되면 부랴부랴 집에 돌아와 따뜻한 새 밥을 해야만 했단다. 아침과 저녁을 매번 새로 밥을 짓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관리를 잘하셔서 작동이 잘 됐었는데 얼마 전부터 완전히 멈췄다며 애석해 하신다. “나도 이 시계처럼 갈 때가 됐다.” 말없이 잡아드린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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