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5

도서관보다 공원

도서관에 가려고 나섰다. 책 두 권과 노트북을 챙겼다. 딸 유이도 함께다. 집에 있을 땐 몰랐는데 나와보니 햇살이 어찌나 따스하던지 몸이 나른 해지고, 마음이 녹아내린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어지럼증이 날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쪽빛 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 만 같은 짙푸름이다. 집에서 도서관에 가는 길은 작은 다리를 건너 큰 도로변의 신호등을 지나 오르막길을 얼마 동안 씩씩 거리며 걸어야 한다. 신호를 기다리며 큰길에 섰다. 황금색 은행나무 뒤에서 햇살이 속삭인다. "오늘은 도서관보다는 공원에서 나랑 놀아!" 무거운 노트북이 들어있는 가방을 메고 도서관이 아닌 공원으로 갔다. "유이야! 햇살이 좋다. 공원으로 가자!" 본래 계획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 후에 공원을 갈 생각이..

일상. 에세이 2024.11.10

비가 오면 오는대로

일하다 말고 창문을 열었다. 가을비가 촉촉하다. 잠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여름에 쏟아지는 시원한 폭우도 좋지만, 나뭇잎을 적시듯 보드랍게 내리는 가을비도 정겹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비를 감상하는 것은 좋지만, 우산 없이 비 맞는 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딸 유이의 대학 입학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갔었다. 대학 입학이 기념할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고등학교 3년 동안 너무 고생한 딸이었기에 무사히 졸업한 것만으로도 유럽 여행이 아깝지 않았다. 맞지 않은 음식과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로 스트레스가 심했고, 면역력에 문제가 생겨 각종 질환으로 힘들었던 딸이다. 스포츠 동아리 활동 중 아킬레스건 손상까지 입어 제때 치료를 못 하는..

일상. 에세이 2024.10.22

가을.낙조

구름에 걸린 해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서해 끝자락 바다 위에 붉은빛의 길이 만들어진다. 마치 처음 낙조를 본 듯 숨을 멈추고 집중한다. 기어이 바다가 붉은 해를 삼킨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쉬며 여기저기 탄식의 소리가 들린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색채에 감탄과 아쉬움의 소리다. "괜찮아 내일도 볼 수 있어" 아이를 달래는 젊은 아빠의 소리에 아이보다 내가 더 아쉬움을 달랬다. 늦잠이 달콤했다. 간밤에 휴일을 믿고 늦게 잠든 탓에 쉬이 잠이 깨지 않았다. 남편은 벌써 준비를 마쳤는지 옷을 차려입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강아지까지 함께 하는 나들이라서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다. 정리 안 된 집안 꼬락서니가 신경이 쓰여 청소라도 하고 집을 나서고 싶지만 참는다. 청소한다고 설치면 남..

일상. 에세이 2024.10.20

가을 수채화

가을 색채가 아름답다. 그새 붉어진 나뭇잎이 놀이터 나온 꼬마의 머리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발밑으로 떨어진다. 까르르! 웃는 아이 모습이 가을 수채화처럼 맑다. "너는 세상이 평면이냐? 원근법도 모르냐? " 중학교 2학년 미술 선생님에게 들은 말이다. 미술 선생님이라서 수업 시간에 당연하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듣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말이 지금껏 잊히지 않고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꿈이라는 것과 연결되어서 그렇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누구에게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미술 시간이 좋았다. 적어도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4절지 스케치북에 4B연필로 내 맘대로 이것저것 그리며 놀았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였다. 가을 풍경화 그림이었으니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반 아이들 모두..

일상. 에세이 2024.10.14

아버지의 선물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놀이터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물들어 가는 나뭇잎을 손바닥에 올리고 있다. 막 익기 시작한 감나무의 감이 아이들 노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 아이가 말한다. "저건 감이야!" 옆에 있는 아이가 말을 받는다. "나는 감 먹어봤어!" 그러자 다른 아이가 말한다. "나는 감 밥 먹어봤어! " 아이들의 대화가 천진스럽다. 감 밥이라니. 감을 먹어봤다는 아이에게 더 세게 보이고 싶은가 보다. 문득 친정집 감나무가 떠오른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터만 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단감나무만이 푸른 잎과 열매를 맺으며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엄마는 감을 좋아했다. 시골인데도 다른 집과는 달리 우린 감나무가 ..

일상. 에세이 2024.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