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내 손에 쥔 곶감 처럼 특별한

빛나는 오늘 2024. 10. 1. 20:51

얼마 전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아버지 옆에 엄마도 나란히 있다. 살아생전 늘 함께 했던 것처럼.

추석 때  찾아보지 못해서 시간을 내었다. 문중의 선산은 이제 관리하는 사람도 없나 보다. 명절에만 하는 벌초라서 그런지 잡풀이 무성하다. 선산 관리가 안 된다는 이유로 주변의 봉분들은 하나 둘 비어간다. 관리가 되는 납골당으로 자손들이 옮겨 간 것이다. 지나다니는 짐승들만이 쓸쓸하게 말벗을 해주고 있는가 보다. 흰머리가 희끗한 막내가 온 줄 알면 왔냐는 말도 못 할 만큼 반가워서 활짝 웃기만 할 텐데.

종가의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문중에서 가장 어른이었다.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들도 아버지에게는 늘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허락을 구했다. 작은 아버지들의 도박으로 논 밭을 날리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는 들 판이 아버지 땅일 만큼 부자였다고도 한다.

당연히 제사가 많은 집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일년에 십여 차례는 족히 지내지 않았나 싶다. 그 시절엔 왜 그렇게 제사가 많았는지 모르겠다. 요즘 세상에서는 꿈도 못 꿀 일 아닌가. 엄마가 했던 고생이 눈에 훤하다.

어릴 적 아버지는 제사상에 눈을 빠뜨리고 쳐다보는 나에게 언니 오빠 몰래 곶감을 슬쩍 쥐여주곤 했다. 나만 보물을 얻은 것 같은 감동에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아버지의 존재도 나만 얻은 곶감처럼 특별하다.이쯤 되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더듬어 기억해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버지는  종가의 종손에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를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웃음이 많았고, 마음이 아이처럼 순했다. 장손의 위엄 보다 친구 같은 편안한 아버지였다.

  어머니와 막 결혼했을 당시 서울에서 경찰로 6년을 보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속병(위암) 을 얻어 운신이 어려워지자 집안의 장손을 시골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농사꾼이 된 아버지는 천성이 유약한 탓인지 집안을 강단 있게 이끌어가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엄마가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농담을 많이 했고, 재미있는 말로 우리를 웃게 해주었다. 오빠가 잘못을 저지르면 라디오를 들고 서있게 하거나 언니들의 긴 머리카락을 서로 묶어 화해할 때까지 세워 놓기도 했다. 키득거리는 나에게 언니 오빠는 주먹을 쥐어 보였었지.

가는 세월은 어찌할 수가 없다. 다른 문중 어른 들처럼 어머니, 아버지도 가까운 곳으로 모셔야 하나 오빠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본다.  오빠는 착잡한 듯 어두운 얼굴에 말이 없다. 애꿎은 쐐기풀만 잡아 뽑는다. 자주 찾아오지도 못하는 자식들을 밤나무만이 무심한 듯  물끄러미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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