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완벽한 사랑

빛나는 오늘 2024. 9. 23. 20:30

퇴근길에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다. 우산을 펴보니 너무 작다. 세찬 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비상용으로 넣어 다니던 우산이라서 그렇다. 간밤에 잠이 부족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피곤하게 느껴진다. 비마저 바닥에 꽂힐 듯 세차다.

기분이 가라앉는 날에는 어김없이 엄마 생각이 난다. 제철 음식으로 먹고사는 환경인 시골이라서 엄마는 계절이나 날씨와 관련된 음식을 자주 해주곤 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오늘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엔 틀림없이 팥죽이나 칼국수를 상에 냈을 것이다. 또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겠지. “00야 작은 집에 팥죽 한 그릇 드리고 흰밥 조금만 얻어 오너라.” 팥죽을 먹지 않는 동생의 밥을 같은 동네에 사는 작은 어머니 댁에서 얻어 오라는 심부름이다. 동생의 밥 담당은 언제나 나였으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을 쟁반에 받쳐 들고 가서 밥과 바꿔 왔겠지.
 
“여보 저녁 먹었어? ”
“아직 안 먹었지.”
“팥죽이 생각나. 팥죽 먹으러 가자.”
남편이 차를 가지고 정류장까지 와주었다. 비를 뚫고 팥죽집을 찾아다녔다. 이렇게까지 먹어야 하냐고 남편이 물었지만 “응” 꼭 먹어야 했다.
 
네이버 지도를 펴고 겨우 한곳을 찾아간 시각이 밤 8시다. 늦었다고 주문을 거절하면 어쩌나 조바심 내며 기어이 팥죽과 마주했다. 투박한 투가리에 거무스름하게 담긴 새알 팥죽이다. 내가 찾은 건 팥 칼국수였다는 것을 순간 알았지만 늦었다. 쉽사리 수저를 들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는 나에게 “노래를 부르던 팥죽인데 왜 ?”감상만 하고 있냐는 소리다.

팥죽이 누구의 손에서 어떻게 끓여졌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색깔도 비슷하고 면 대신 새알이지만 그럴듯하다. 엄마 아닌 다른 사람 이 끓여 준 것은 싫다. 그래도 시킨 음식이니 한 숟가락 입에 넣어 맛을 보았다. 어린아이 이유식처럼 미지근하고 아무 맛이 안 느껴진다. 엄마처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을 치댄 밀가루 반죽을 넓은 나무 도마에 놓고 길죽한 방망이로 밀어 보름달의 두 배는 될법하게 둥글게 만든다. 이불을 개듯 차곡차곡 접어 칼로 썰어 털어낸다. 달라붙지 않게 밀가루를 중간중간 한 번씩 뿌려줘야 한다. 팥을 뭉근하게 끓여 으깨어 이미 끊고 있는 솥에 고루 털어가며 면을 넣는다. 불 조절을 하던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며 “김을 구워 주랴. 조기 한 마리를 구워주랴.” 하신다.

혀를 데일 것처럼 뜨거워야 팥죽이다. 앞에 놓인 김치가 흐려지며 반찬 그릇들이 어른거려 보이지 않는다. “ 왜 맛이 없어? ” 하더니 한입 먹는다. “음? 아주 맛있네. 세상 좋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먹을 수 있는 세상.“ 앞에 놓인 팥죽을 밀어 남편 앞에 놔주며 말했다.”이 집은 팥죽 맛을 모르는 사람이 끓인 것 같아.” 애꿎은 팥죽 맛을 탓했다.
 
여름에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해가 꼴딱 넘어가도 여전히 더운 저녁에 뜨거운 팥죽에 혀를 데어 가며 먹었었다. 팥죽을 먹은 건지 엄마의 사랑을 먹은 건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건 아마도 완벽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행복한 저녁을 먹을 땐 아버지가 늘 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00아 아버지 군대 이야기해 주랴? 하루는 말이야… .”

그날의 행복한 기억이 있어서 오늘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은 흘려보내야 한다고 한다. 흘려보내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도마 위에서 면이 또각또각 소리 내며 썰어지는 엄마의 칼질 소리, 아버지가 장작불에 지글지글 구워주던 생선 맛이 그것이다.
 
결국 저녁을 굶었다. 아니 굶을 뻔했다. 집으로 돌아온 내게 남편이 조용히 캔 맥주 하나를 내민다. 멋쩍게 바라보는 눈이 따뜻하게 웃고 있다. “ 엄마 배고프면 빵 먹어 .” 말하는 딸 재이 말에 웃음이 터졌다. 빵과 캔 맥주를 먹고 잠이 들었다. 엄마가 만들어 주던 팥죽도 사랑이고, 남편과 아이가 챙겨준 캔 맥주와 빵도 사랑이다. 없으면 버틸 수 없는 찐 사랑 말이다. 그나저나 진짜 팥죽 잘하는 집을 알아두어야 할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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