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엄마! 오랜만에 순댓국

빛나는 오늘 2024. 11. 14. 22:49

 
해가 짧아진 요즘 여섯시면 이미 날이 어둡다. 퇴근을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벌써 불빛들이 선명하다. 밝은 해가 있는 낮이 좋다. 늦가을, 이맘때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저녁이되면 조용한 정적이 감도는 시골의 밤은 고독하고 쓸쓸하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시골의 적막함이 싫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만이 적막을 깰 뿐이었다. 불빛이 많은 도시의 밤과는 사뭇 다르다

 
늦가을 찬바람을 맞으며 산 너머로 해가 사라지는 것을 매일 보았었다. 들 일을 간 엄마와 아버지는 사방이 깜깜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을엔 수확철이라 이것저것 손가는 일이 많았던가 보다. 적막한 집에서 컴컴한 외로움을 혼자 견뎌야 했다.
 
지금도 짧은 해가 사라지고 난 후의 어스름한 저녁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다. 퇴근 시간이 되면 누가 쫓아 오기라도 할 것처럼 집으로 오기 바쁘다. 밖에서의 어둡고 스산함이 싫어서다.
 
주머니의 휴대전화 진동이 요란하다. 엄마의 퇴근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 엄마! 끝났어?" 하고 전화하는 둘째 재이일 것이다. 재이는 일상의 시시콜콜한 얘기를 엄마에게 말하는 걸 좋아한다.
 
서둘러 집으로 가고 싶은 나는 어딘가를 들려야 하는 부탁이 아니기를 바랐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다정하게 대꾸했다..
 
" 어, 재이야! 필요한 거라도 있니?"
"엄마! 지금 스카(스터디 카페) 가려는데 저녁을 못 먹었어."
"간단하게라도 먹고 가."
"엄마랑 밖에서 먹고 가면 안 돼? 오랜만에 순댓국이 먹고 싶어."
 
집 근처의 순댓국집에서 만나자는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퇴근 중이라는 남편의 전화다. 순댓국을 먹지 못하는 남편은 구경만 하고 나 역시 좋아하지는 않은 음식이지만, 재이의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재이는 "아~ 맛있다!" 하며 야무지게 뚝배기를 비웠다.
 
밖에 나오니 옷이 얇아 한기가 느껴졌다.
남편이 웅크리고 걷는 내 어깨에서 가방을 가져가 본인의 어깨에 멘다. 어깨가 가벼워진 나는 딸의 무거운 백팩을 달라고 해서 등에 멨다. 남편은 내 가방을, 나는 딸의 백팩을 메고 집으로 왔다. 재이는 스카(스터디 카페)로 다시 갔고, 남편과 집에서 계란찜과 미역국으로 밥을 먹었다.
 
특별할 것 없는 퇴근길 일상이지만 내게는 의미가 있다. 어린 시절 어둠이 주던 외로움과 고독이 지금은 가족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있는 느낌이 있어서다. 엄마의 퇴근을 반기는 딸의 전화 와, 순댓국을 좋아하지 않아도 함께해 주는 남편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느낀다. 서로의 가방을 나누어 메고 걸을 때 전해지는 잔잔한 다정함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삶의 풍요로움은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녹아있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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