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상실감에서 나를 지키는 힘

빛나는 오늘 2024. 11. 11. 22:40

 
"유이 엄마야! 가을 무가 맛있어서 주고 싶은데 꼼짝 못 하고 있으니 ... .너희 형부가 있었다면 차로 휘리릭 가져다주었을 텐데."
 
예순이 넘은 둘째 언니의 전화다. 언니는 올여름에 남편을 떠나보냈다. 지금은 서울 집에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남편 생전에 정붙이고 살던 시골집에 내려가 있다. 언니 말로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정리해야 할 물건이나 서류 또는 도시가스 문제 등 처리할 게 많아서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마음 추스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인 듯하다.
 
스물다섯에 형부를 만나 결혼했고, 자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투닥투닥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째서 부부 싸움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르냐고 했었다. 젊은 부부들처럼 사랑이 많은가 보다며 놀리곤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40년을 살았다. 언니는 황혼이혼을 말하기도 했고, 졸혼이 뭔지 궁금하다며 묻기도 했었다. 하지만 언니는 늘 말뿐이었고 다투었다는 다음날에도 " 여기 마라도야! 너희 형부가 캠핑카를 배에 싣고 왔어. 여기서 한동안 놀다 갈 거야! " 했다. 그럴 땐 그냥 웃음만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바탕했다는 사람들이 어느새 우리나라 남쪽 끝 마라도에 가 있다고 하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성격이 까탈스러운 편이었던 형부는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했지만, 언니에게는 유독 잔소리가 많았다. 살림에서부터 아이들 일, 집안일 하나하나 관여를 했고 그런 형부를 언니는 못마땅해했다. 그렇지만 내가 지켜본 형부는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주방에서 이것저것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 딸 유이는 지금까지도 이모부가 만들어 준 파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형부는 직업이 자유로웠던 탓에 캠핑카 여행을 가족과 자주 다녔고, 부부끼리만 여행을 가게 되면 보름에서 한 달은 집을 비울 정도였다. 부지런한 탓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진작가 동호회 활동도 열심이었고 웬만한 것은 만들고 고치는 만능 재주꾼 맥가이버다. 캠핑카도 실내장식을 손수 해서 언니가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경제적으로도 식구들을 고생시켜 본 적이 없었다. 언니는 자기가 돈복이 많아서라고 남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에둘러서 표현했다. 말은 늘 형부랑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아이를 넷이나 낳고 장성하게 키워서 결혼도 시켰다. 10년 전쯤 시골집을 전원주택으로 개조해서 서울 집과 번갈아 가며 여전히 투닥거리며 살던 중이었다. 여생 그리 살 줄만 알았는데 형부에게 암이 찾아왔다. 의사는 1년 시한부라고 했지만 4년을 선물처럼 살다가 떠난 것이다.
 
"욕 좀 덜하고 살걸."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무덤덤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 감당해야 할 것들을 버거워한다. 잔소리 대마왕이던 남편이 없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 무섭게 느껴진다고도 한다. 형부의 손때 묻은 농기계며 살림살이들이 있는 시골집에서 남편 손길 없는 서울 집으로 올라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언니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상실감이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공허함이지 않을까. 자식이 넷씩이나 있지만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을 것이다. 그래서 무서움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이 언니에게 필요해 보인다. 텅 빈 집에서 남편 기억만 붙잡고 있을 게 아니라 내면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언니가 좋아했던 것들을 기억해 보고 다시 시작해 보라고 권했다. 긍정적으로 듣더니 " 나중에!"라고 한다.
 
내려놓을수록 많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물건도 내 옆에 있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내가 책을 가까이하고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예고 없이 들이닥칠 수 있는 상실감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르기 위한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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