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느리지만 느리지 않다

빛나는 오늘 2024. 11. 6. 23:26

기분도 날씨를 따라가나 보다. 추워진 날씨만큼이나 마음에 한기가 느껴진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인 것 같기도 하고, 멘탈이 여지없이 나가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본래 자신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성격이다. 친한 친구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하거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그런 상황이 생기면 매번 용기를 내야 한다.
 
그런 내가 여러 사람과 소소한 내 일상을 공유했다. 그들도 나를 다 안다고 할 수 없고,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두 가지 감정이 들었다. 색다른 경험에 흥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내보인 것에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미 지난 얘기가 되었건만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은 내 작은 그릇 탓인가 싶다.
마치 길을 잃어 엄마를 놓친 아이가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엄마에게 잘못을 비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조급함이 생기는 이유다. 이런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시간밖에 없다. 느리게 가고 있지만 길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무거워진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중심축을 나에게 두어야지, 주변에 두면 안 된다고 나를 다독인다.
어제는 업무에 관련된 메일 하나를 보냈어야 했는데 그만 잊어버렸다. 아침이 되어서야 오타가 없는지 확인하고 서둘러 보냈다. 덕분에 지각할 판이었다. 평소에 운동을 위해 30분 정도를 걸어서 지하철을 타는 습관이 있다. '버스를 탈까? 아니야! 빠른 걸음으로 가면 될 것 같기도 해.‘
 
늘 그렇듯이 아침의 지하철역 안은 혼잡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해 보려고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혀 튕겨 나오다시피 했다. 회색 앙고라 스웨터를 입은 젊은 아가씨였다. 나만큼이나 출근길이 급했나 보다. 할 수 없이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사람이 많은 탓에 길이 열리지 않는다. 조급증이 났다.
내려가는 계단은 꽉 막혀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다. 누가 밀기라도 한다면 큰 사고가 생길 것만 같다. 마음만 급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고 평정심을 찾았다. 늦어서 마음이 불편해진다면 그것도 내 몫이다. 앞사람이 가는 대로 천천히 따라 내려갔다. 긴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와 마침 신호 음악과 함께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려는 순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일찌감치 내려간 회색 스웨터의 아가씨가 보였다. 먼저 가지 못했고 같은 지하철을 탔다.
 
아침 내내 허둥지둥 서두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몇 분의 차이를 극복해 보겠다고 빠른 길의 에스컬레이터를 선택하려다 더 늦은 계단으로 왔고, 정작 늦었다고 포기했는데 어차피 먼저 간 사람도 못 가고 있었다. 간신하였지만 지각도 면했다.
오늘의 내 모습에서 두 가지를 얻었다. 지각하는 것이 싫었으면 시간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순리대로 행동해야 결과도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마음만 조급하다고 해서 내 삶에 날개가 달리지 않는다. 빨리 가고 싶다고 해서 빨리 가지지도 않는 것이고,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늦은 것도 아니다. 느리게 가는 것이 절대 느리지만은 않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 없는 진리다.
일상 글을 쓰는 요즘이 힘들다. 그런데도 매일 한편씩 쓰는 이유는 하나씩 버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며, 한계를 두고 싶지 않은 변화의 욕구 때문이다. 내 성장의 잣대는 오로지 나에게만 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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